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한복음 14장 25절-31절/찬송가 474장 최정근 <서론>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구 하나가 있습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입니다. 이 말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가정이 평안해야 모든 일이 다 잘된다.'하는 뜻이지요. 또 이 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가정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평안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안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인내를 해야 평안이 이루어집니다. 또 가족 중에 누가 희생을 해야 평안이 이루어집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참고, 오히려 기뻐할 때 평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성서적으로 해석하면, '십자가를 짐으로 가정은 평안해진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본문 배경 설명>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원합니다. 불안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안으로부터 탈출하여 저 위기와 공포가 전혀 없는 평안의 세계에서 거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너무나 불안하다는 사실입니다. 불안한 젊은이들일수록 잡음과 소음이 혼합된 파열음악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파열음만큼이나 균열이 간 현대인의 내면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불안 때문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류의 처절한 싸움은 불안과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숙원은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474).”이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에는 근심된 일이나 죽을 일이 많습니다.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사건이 어디 한 둘입니까? 우리에게 평안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이 필요합니다. 평안을 빼앗는 것이 무엇입니까?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입니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에 빠져있습니까?
예수 님이 제자들을 떠난다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 님이 떠난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 님이 곧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님이 죽으시다니!”예수 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입니다. 당장에 자신들도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스승이 없는 제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3년 동안 예수 님을 믿고 따랐는데, 아무 보상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장래가 두렵기도 합니다.
예수 님이 죽으신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무지이고 불 신앙입니다. 모든 근심과 두려움은 무지와 불 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 님은 죽으셔야 영광입니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발전되어야 합니다. 예수 님이 좋다고 늘 예수 님 붙잡고 함께 살 수 는 없습니다. 성령을 보내서 일하시는 예수 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알았다면 근심도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론-불안> 어느 주간 잡지사에서 지난 3월 '한국사회 불안감 조사'라는 제목 아래 "당신은 불 안을 느낍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많이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73%, "조금 느낍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20%가 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열에 아홉은 다 불안을 안고 산다는 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가운데서 80% 이상의 사람들이 "작년보다 금년이 더 불안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 지수가 더 높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불안을 느낍니까?"라는 질문에는, 북핵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경제가 점점 나빠지지 않을까, 잦은 구조조정으로 해고가 계속되면 직장을 잃지 않 을까, 건강이 잘못되지 않을까 등 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불안의 요인으로 꼽은 것은 교통사고였습니다.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을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 나서 얼마나 많이 죽는지 모릅니다. 교통사고는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불안의 요인 이 되는 것입니다.
<평안의 오적> 심리학자에 의하면, 마음의 평안을 파괴하는 오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가 탐욕이요, 소유욕입니다. 탐욕과 소유욕을 품으면, 마음의 평안이 깨어집니다. 샬롬이 깨어집니다. 또 지나친 성취욕을 가진 사람은 평안이 깨어집니다. 내가 이것은 꼭 이루어야 되겠다. 성공의 종노릇하는 노예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평안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은 평안이 없습니다. 분노하는 사람도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은 더욱 평안할 줄 모릅니다.
<서론-현대인의 4가지 불안>
현대인들은 네 가지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고 한다. 사고와 건강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갖고 산다. 특히 우리 나라는 교통사고로 만 여명씩 죽으니 얼마나 불안한가? 그리고 범죄도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잔인하게 살인하고 빼앗는 상상치 못할 범죄들이 일어난다. 요즈음에 다양한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해도 찾아내지 못하는 질병이 있고 치료하지 못하는 질병이 있기 마련이다. 이같이 사고와 질병으로 인하여 죽으며 어떻게 하는가? 불안을 지니고 산다.
둘째로 현대인들이 갖는 불안은 사업의 실패에 대한 불안이다. 특히 요즈음에는 은행도 불안하고, 물가도 안정이 되지 않고, 사업이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사업 실패의 불안이 많은 사람들이 느끼며 마치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은 느낌을 경험한다고 한다.
셋째로, 현대인들이 겪는 불안은 인간관계에서 얻어지는 불안이다. 가정이 해체된다. 부부가 싸우고 이혼하고 자녀들은 나뉘어져서 살게된다. 학교에서는 인간관계 사이에서 왕따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불안을 느낄 수 있다.
넷째로, 현대인들이 겪는 불안은 자신의 죄에서 오는 불안이다. 도둑이 제발 절인다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 불안한 마음을 견딜 수 없다.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면서 그 죄로 인하여 불안해 한다.
이같이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안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참으로 편리한 생활을 하지만 과거보다 더욱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혼자 있으면 불안하니까 계속해서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조용하면 또 불안을 느끼니까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서 불안을 이기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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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사람은 불안을 중독증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다. 두려운 일이 생기거나 불안한 일이 생기면 어딘가에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술에 의존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알코올 중독증에 걸린다. 어떤 사람은 점치는 일에 의존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불안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두려움이 심해질 뿐이다. 무속인들이 하는 일은 더 겁을 주고서 부적을 갖고 다니지 않거나, 굿을 하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오히려 심한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다 준다.
아무리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많다해도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
<예-불안> 스탈린은 굉장히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독살하지는 않을까 불시에 타살되지는 않을까 하여 항시 두려움 속에 살았다. 그에게는 8개의 침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은행의 금고처럼 단단히 잠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침실도 그에게 편안한 밤을 줄 수 없었던 것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스스로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평안의 뜻-하나님과 연합, 결합, 연결-중요> 그러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 불안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평안함을 유지하며 살 수 있겠는가? 평안은 희랍어로 에이레네라고 부른다. 이 희랍어는 결합하다, 연결되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평안함, 평화는 곧 결합되고, 연결될 때에 가져다 주는 결과라는 것이다. 언제 불안한가? 연결이 끊어졌을 때에, 서로 분리되었을 때에 불안하지만 연결되고 서로 하나가 될 때에 참된 평안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관제탑> 만일 비행기를 타고서 미국을 가는데 조종사가 지상의 관제탑과 계속해서 교신을 하면서 간다. 그런데 그 교신이 끊어져서 조종사가 알아서 길을 찾아가야 한다면 얼마나 불안할까? 계속해서 연결될 때에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와 연결될 때에 참된 평안이 있는가? 우리는 주님과 연결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있다.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이 임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곧 참된 평안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부활하신 후에 많은 제자들이 두려워서 떨고 있었다. 문도 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 가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다.
<기드온-성경 예> 기드온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 사람들이 괴롭혔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시고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미디안 사람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기드온이 "나는 므낫세 중에 가장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입니다." 내가 어떻게 미디안 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나이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그래도 기드온이 불안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염소 새끼하고 무교병을 만들고 국을 담아서 가져왔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그대로 하고 지팡이의 끝을 바위에 대니 불이 나서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다. 기드온은 이 광경을 보고서 하나님이 나와 연결되어 있구나, 나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다. 샬롬은 평화, 평안을 의미한다. 여호와 샬롬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 지금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신할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지금 여러 가지로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 주시는 선물이다.
<어머니 뱃속 이야기-예>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운다. 우는 이유는 불안해서 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어머니의 맥박소리를 들으면서 열달을 지냈는데 세상에 나와 보니 탯줄로 연결되었던 것이 끊어지니 얼마나 불안한가? 불안한 아이를 안정시키려면 어머니의 맥박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모유를 먹일 때에 왼쪽 가슴에 안고 왼쪽 젖을 먹인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심장이 왼쪽 젖가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가 젖을 먹으면서 그 맥박 소리를 듣고 안정감을 갖는 다는 것이다. 모유를 먹이면서 엄마와 아기가 끊어졌던 맥박이 다시 연결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원한다. 평안은 연결될 때에 오는 것임을 분명히 알자. 아이가 탯줄로 어머니와 연결되어 맥박 소리를 들을 때에 평안한 것처럼, 주님과 연결되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자. 그럴 때에 참된 평안함이 넘칠 줄로 믿는다.
주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불안하지만,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평안을 주신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5절 해석> 25절-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절 해석> 26절-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지금 성도를 위해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일을 대신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길을 마련하시는 분으로 계셨듯이 보혜사가 이 일을 마련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고 그 공백 상태를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대신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야하는 것입니다. ----
<27절 해석> 27절-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1.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27).
세상 사람들은 평안을 외부적인 환경이나 물질에서 찾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수면제로 얻은 평안은 몇 시간 못 갑니다. 내일 밤이면 또 괴롭습니다. 술로 얻은 평안은 술기운이 사라지면 형편은 더 악해집니다. 가난해서 먹을 양식이 없는 가정은 땀 흘려 일해서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이 있습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물질이 없어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집안에 없던 돈이 한번에 많이 생기면 오히려 집안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물질이 반드시 좋은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계속적인 물질을 요구합니다. 만약 물질이 지속적으로 공급이 끊어지면 그 평안은 사라집니다. 명예나 권세로 얻은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명예가 사라지고 권세가 사라지는 순간에 평안도 사라집니다. 젊음이 주는 평안도 그렇습니다. '정 몽헌'라는 최정상의 현대그룹의 총수가 왜 자살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마음속에 '평안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물질과 명예를 가지고 살았다하더라도, 그 속에 평안이 없다면, 사는 것 같으나 실상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으로 마음이 항상 무엇인가초조하고 불안한 사람은 삶의 의미조차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물질(명예)로 채 울 수 없는 평안! 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 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는 자는, 마음속에 근심과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늘의 충만한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 같은 평안의 축복이, 예수 님을 믿는 우리 속에 이미 거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당하고 있는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 님 앞에 엎드려 예수 님 발에 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예수가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그 행실이 얼마나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사람들의 차가운 이목과 시선을 받던 그 여인은 마음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은데, '과연 예수 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약간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 님 발에 부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십니다. 그 여인은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평안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은, 예수 님의 옷자락을 만져 깨끗이 치료함을 받고 예수 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예수 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고, 불안해 떠는 자들의 마음속에 참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 님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님께서 나타나셔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 님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평안을 끼치는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을 전도 파송 보내시면서도,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평안함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안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만약, 그 집이 예수 님의 평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 평화가 기도한 사람에게로 되돌아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죄인들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 님을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평화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평안을 줍니까?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평안을 줍니다. 지난날에는 예수 님이 직접 평안을 주었지만,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주십니다. 이것은 발전된 것입니다. 지난날 보다 더 강력한 평안입니다. 예수 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 님에게서 평안을 보았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 한마디, 예수 님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기적을 보았고, 그것은 그들에게 하늘의 평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 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대신 보혜사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 더욱 심오하고 강력한 평안을 주십니다.
눈과 귀로 듣고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느끼는 평안입니다. 손과 발로 감각적으로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영적으로 마음으로 맛보는 평안입니다.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영원히 지속되는 평안을 맛봅니다. 보혜사 성령이 주는 평안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보편적인 평안입니다. 조건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는 평안입니다. 병상에서나 지하철에서나 자동차 안에서나 궁궐이나 초가집이나 다 같이 누리는 평안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그럴듯한 환경 적인 요인을 갖춤으로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일어나지도 못하는 새벽에 임하는 평안이고 남들이 곤한 잠에 떨어진 밤중에 임하는 평안입니다. 머리로 얻는 평안이 아니고 가슴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무슨 재료나 기회가 되어서 조건으로 얻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만 받으면 얻는 평안입니다. 돈이나 배경이나 아무 것도 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분위기나 환경과 상관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어떤 환경 적인 요인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2.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 자기 도취의 감옥입니다. 항상 자기가 최고인줄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공주병' 또는 '왕자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자기 도취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2).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비판의 감옥입니다. 마7:1절 이하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이와 같이 남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사람이, 비판의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절망의 감옥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절망하는 사람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절망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평화를 소유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4). 옛 일만을 황금시대로 생각하는 과거 지향적인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거듭 말하면서 과거에 안주하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도전정신이 약해집니다. 과거 지향적인 감옥에서 벗어날 때,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게 되고, 희망과 용기와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5). 다른 사람의 것만 좋다고 생각하는 선망의 감옥입니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인다는 우리 속담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과 상황인데도 자신이 더 힘들고 더 어렵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최고로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남의 것만을 좋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는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것만을 좋다고 생각하는 선망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6).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감옥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듯이, 남이 잘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 배가 아픈 사람입니다. 이러한 여섯 가지 감옥. 즉, 자기도취의 감옥, 비판의 감옥, 절망의 감옥, 과거 지향적인 감옥, 선망의 감옥, 그리고 증오와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님이 성령 님을 통하여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은 가진 자가 평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부자는 그 부함 때문에 더 많은 염려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인기 있는 연예인이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의 이목을 많이 의식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 함보다는 겉치레를 포장하는 경우가 더욱 많아 부자유스럽습니다. 전쟁에 사용할 무기가 많으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수물자를 증강하지만, 더욱 전쟁의 공포와 불안은 더해가기만 합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은, 물질의 평안, 건강의 평안, 또는 명예와 권력의 평안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가져다주는 이 같은 평안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눅12장에서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말하기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다"(눅12:19-21)고 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노력합니다. 재물을 많이 모은다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통해서 평안을 얻고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부자와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기에,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해하거나 세상에 속한 것으로 평안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은 너무나도 제한된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님이 주시는 평안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을지라도, 또한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평안입니다(합3:17, 18).
어떻게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라.
전쟁터에 나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전쟁터에서도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왜 성경책은 가지고 갑니까? 세상에서 자유 할 때에는 읽지 않던 성경을 왜 감옥에서 읽습니까? 성경이 마음의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모함을 당하거나 승진에 누락되었을 때 주로 읽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어린아이와 같아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안을 얻습니다. 성경은 이상하게도 실패하고 낙심된 사람에게 더욱 강력한 평안을 줍니다. 보혜사 성령이 말씀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다른 세상 적인 무엇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와 함께 할 때, 영생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을 성경에서 말미암느니라.
둘째, 기도하라.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기도는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와 계십니다. 기도로 성령 님과 대화합시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합시다. 엘리야는 기도합니다.“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 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왕상19:4).”힘들고 살기 싫다는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옳다고 할 수 없지만,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면 하나하나 치료하시고, 그 자리에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 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합니다.“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합니다.” 예수 님도 인성을 가진 분이라 죽음을 피하고 싶다고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고도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얻는 평안은 알기 때문에 사자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도하기 전에는 고민도 많고 갈등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일어서면 달라집니다. 평안이 가득합니다. 풍랑과 파도가 잠잠해지는 이 맛에 기도합니다. 산을 오르거나 낚싯대를 던지고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면서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깊은 평안 오래가는 평안, 질적으로 우수한 평안을 맛볼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을 때 평안이 찾아옵니다(29).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지 못하면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마음이 편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희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다른 열 명의 정탐 군이나 믿음이 없는 백성들은 낙담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여 가나안이 아닌 광야로 가버렸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40년 동안 이들에게는 진정한 평안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주시는 평안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참 평안을 얻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러한 불안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 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는 예수 님의 공약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약속이며, 이 약속은 이미 믿는 자에게 성취된 약속입니다. 예수 님을 믿는 자는 이미 그 마음속에 영원한 평안,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평강의 주님'이 되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셨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이 같은 약속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분명히 믿어져서, 풍랑 많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평강을 늘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평생동안, 아무리 세상의 풍파가 요동하고 우리를 거스린다 하여도, 결코 흔들림이 없이 늘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예수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우리는 예수 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해서 평화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평화가 없습니다. 시대가 악해진다는 증거 중에 하나는, 세상에 믿음이 없어진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로간에 불신 때문에 점점 세상은 악해져만 가고, 서로 믿지 못해서 평화가 깨지고 맙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고 하셨습니다. 예수 님을 믿는 자는, 감사와 기쁨과 평강의 축복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영생의 샘물처럼 흘러 넘쳐 납니다. 예수 님은 물 속에 빠진 베드로를 손으로 꼭 잡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 님께 모두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예수 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모두 다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그리고 괴로울 때, 힘들 때, 낙심될 때 주님의 얼굴 바라보십시오.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하거나, 또는 내 모습만으로 만족해하지 말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예수 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 님 때문에 즐거워하십시오. 그리하면, 평강의 주님께서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한 참된 평강으로 우리 심령 속에 가득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 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서,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평강이 우리 심령 속에 늘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평안합니까? 그것은 불안의 뿌리가 죄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죄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않는 한 아무리 불안의 세력을 자르고 잘라 낸다 하더라도 어느새 고개를 다시 치켜듭니다. 아무리 불안의 환경을 제거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바꾸고 바꾼다 할지라도 불안은 또 다시 찾아오고 불청객으로 방문을 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이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을 받아야 참 평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 되게 합니다. 죄가 가로막는 한 평안은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죄입니까? 다윗은 몸은 비록 궁궐에 있었지만 마음은 지옥에 있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여름 가믐에 마름 같은 고통이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지만, 마음이 괴로워서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 되고 어떻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어떤 죄라도 회개합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올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객지에서 마음 고생하느니 차라리 아버지에게 돌아와서“잘못했습니다”하고 매를 맞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니까 마음만 편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권리도 회복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안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작은 병도 오래두면 큰 병이 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병이라도 초기에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이 만병의 원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죄가 있다면 다 회개합시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참 평안을 얻는 삶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한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그것은 적어도 폭풍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지금 폭풍이 일어나 죽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엉망입니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엄청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폭풍, 그 위기보다 강한 힘이 있습니다. 바로 그 강한 은혜의 힘이 그들을 붙들어 주기 때문에 참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위기가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걱정, 근심도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무서운 위기와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덮어 버리고 그것을 이기게 해 주는 더 큰 힘과 은혜가 있기 때문에 평안한 평안입니다. 이것이 참 평안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이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죄 문제를 해결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오늘 혹시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 계시면 예수 믿으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아십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비교도 안되고 견줄 수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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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짱> 어느 자동차 공장의 정비사가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시동이 꺼졌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자동차 본넷트를 열고 살펴보았는데 고장난 부분을 알 수 없습니다. 한참 땀을 흘리는데 어떤 노신사가 다가와 말합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정비사가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제가 차량 정비를 한지 벌써 20년 되었소!" 노신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어떤 부분을 툭 건드렸습니다. 그러자 차가 금방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 노신사는 그 차를 발명한 포드였습니다.
우리들은 너무 높아져 있습니다. 몇 십년 동안 무엇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방에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고 어려움도 많이 당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도와줄까?" 여러분! 하나님의 초청에 자신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매우중요).
<염려하는 시간에 기도하라-기도에는 실패가 없습니다.-문제와 근심, 걱정, 어려움에서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돌파하십시다. 힘을 주시옵소서라고 .... >
<기도의 중요성> 앤드류 머레이는 기도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늘을 좌우하는 지상 유일의 힘이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간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무엇보다도 기도에 강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가 있으면 뚫고 나가면 됩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이면 기도하면 됩니다. 너무 다른 어떤 스타를 찾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사람들이 스타입니다. 그러므로 혹 다른 것에서 실패할지라도 기도에서 실패하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이지 기도가 우리에게 실패하는 일은 없습니다. 기도에는 실패가 없습니다(매우중요). 다만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실패할 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기도 응답이 오기 전에 내 속에 힘이 생깁니다. 마음의 평안이 생기고, 지혜와 명철이 생깁니다. 그것이 기도응답만큼 중요합니다.
----- *** 평안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평안이 없다
<중요 성경구절-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중요> 예레미야 29장 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 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고 장래에 소망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안 이상 그 하나님 품속 에 우리가 안기면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면 죄가 용서함 받고 마귀의 발톱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 고 영존하시며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면 우 리 마음 속에 휴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22장 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안은 인간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날개 아래 거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의 지할 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매우중요 성경구절>
시편 91편 4절로 6절에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날개 밑 내가 편히 거하네’ 주님은 어미 닭처럼 우리를 그 날개로 품으시고 그의 성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밤에 놀라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밤에 놀라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당하는 시련입니다. 밤중에 갑자기 흉한 소식이 들려오면 얼마나 놀랍니까? 밤중에 마음이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부지불식간에 당하는 시련입니다. 충동적인 살인이나 납치를 당하는거나 유괴를 당하는 것이나 우리의 정보가 유출당하거나 카드빚 사기 등 요사이 밤에 깜짝깜짝 놀랄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힘으로 막을 도리가 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주 날개 안에 있으면 이런 일도 주님이 피하게 해주십니다.
<보호하심 예화> 미국의 저명한 뉴스 평론가인 폴 하빈은 다음과 같은 사건을 보도한 일이 있습니다. 네브 라스카주에 있는 비트리스라는 도시의 웨스트사이드침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30분에는 성가대 연습이 있기 때문에 대원들은 거의 모두 그 시간에 교회 에 모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결코 전에 없었던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 도 빠짐없이 대원 전체가 성가대 연습시간에 좀 늦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피아노를 반주 하는 자는 저녁을 먹고 잠깐 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에 성가대원인 그의 어머니 와 함께 늦을 수밖에 없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한 성가대 여학생은 학교의 급한 숙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늦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한 부부는 항상 교회오는 길에 다른 대원들 몇명을 태워서 데리고 오는데 대원들을 태우고 오다가 자동차 엔진이 꺼 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엔진을 다시 고쳐서 오기 때문에 늦어져서 시간 안에 못온다고 연락 이 왔습니다. 정말로 이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그날 저녁에 18명의 성가대원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늦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7시 30분에는 반드시 성가를 연습해야 합니다. 그런 데 연습시간 7시 30분까지는 평안했는데 바로 그날 1950년 3월 1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에 교회 지하실에 있는 가스 파이프가 새서 대폭발이 일어나고 교회 전부가 불타버렸는데 성 가 연습실이 바로 가스실 위에 있었습니다. 7시 30분에 정시로 모였으면 한 사람도 빠짐없 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서 죽었을 것인데 그날따라 18명 성가대원 모두 일이 생겨서 정시에 교회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 살았습니다. 주 안에서 사는 사람은 사건이 생겨도 하 나님 뜻인줄 알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발버둥 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알아서 이 사람들을 다 피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 <주님이 주신 평안 예화 감동> 저는 몇일 전 고층 빌딩의 승강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한 정신 박약아와 그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휠체어를 잡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거기 타고 있는 이미 다 자란 정신 박약아, 이 아이는 자꾸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해달라고 합니다. 바깥 구경도 하고 신이 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어머니는 불편하고 외롭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은 밀려들어오지요. 오는 사람마다 다 큰 아이가 휠체어에 타고 밖을 보고 있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피곤해 보입니다. 괴로워합니다. 애처롭습니다. 수치감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바로 정신 박약아의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사랑이 있기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평안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28절 해석> 28절-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예수님의 가심을 기뻐할 이유가 무엇인가? (1)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그가 영화를 얻으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며(히 12:2), (2) 그가 가심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까닭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이것은, (1) 예수님께서 땅에 계신 동안 영광을 취하시지 않은 고로 아버지보다 낮음을 가리키고, (2) 그가 중보자(中保者)의 지위에 계신 것 만큼, 그 역사에 있어서는 아버지에게 종속(從屬)하심을 말함이다.
<29절-31절 해석> 29절-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절-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절-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는 사랑함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은 단순히 그렇게 해야지 나에게 복이 돌아오고 오지 않는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의 결과로 만들어진 하나, 한 뿌리, 한 덩어리가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리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통하여 교회란 우리가 만들려고 만든 단체가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여 만들어진 모임이라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일에는 관심 없고 무슨 일을 위한다던가 계모임과 같은 친목을 위해 모인다면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새로운 한 덩어리가 된 존재라는 것을 이 세상 속에 드러내야 합니다.
------- 이 부분 말씀은 14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결론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곧, (1) 그가 이 부분에 미리 말씀하신것은, 그 일이 성취될 때에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29절)과 (2) 사단의 무리가 와서 예수님을 고난의 자리로 잡아 간다는 것이다(30-31).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곧, 사단은 예수님을 정죄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속하셨으며, 또한 그에게는 전연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 <결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27).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평안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예수님의 참된 평안이 찾아옵니다(29)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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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시대가 불안의 시대고 우리의 존재가 불안한 존재이고 현세계가 불확실의 시대인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 마음에 안심을 갖고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 땅에는 풍파가 늘 일고 안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우리 마음속에 평화(평안)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평안은? ,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믿고 또 믿고 또 더욱 믿을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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