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무지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무지개에 비유해서 말한다. 삶 속에 폭우가 쏟아질 때 저 위의 무지개를 보아야 한다. 삶이 구름으로 덮히고 앞길을 분간하기 어려운 때 위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아야 한다. Wordsworth 는 노래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 보노니 내 마음은 기뻐 뛰노라. 내 생명이 시작할 때도 그랬고 장성한 사람된 지금도 그러 하노라 내가 늙어졌을 때도 그러할 것이니 만일 그런 감격을 가지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노아가 홍수를 만난 후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시며 약속을 했다. 다시는 심판과 무질서가 없겠고 새 질서와 새 세계를 약속하셨다. 어두운 삶 속에서 무지개의 꿈을 바라보는 사람은 새 질서와 새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우리는 빛과 생명의 꿈을 마음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마음의 힘을 모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서 모세에게 말한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니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 3:10) 고통받는 민족을 구해내기 위해 용기를 내어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막강한 힘의 바로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세상의 막강한 힘 앞에 대면하기 위해 용기로 마음의 힘을 모아야 한다. 불타는 가시덤불, 하나님의 권능의 임재 앞에 서야 한다 사명감의 불이요 책임감의 불이다. 이는 마음의 불이요 약속을 믿는 마음의 무지개이다. 마음에 무지개가 없어지면 정신적 질병에 걸리는 것이다. 성격장애 인격장애 등은 마음에 힘이 없어진 상태에서 온다. 그러나 마음에 힘이 없는 상태를 치료하기란 쉽지 않다. 정신과에서 성격장애의 치료 방법이 중구난방으로 많다는 사실은 성격장애를 치료하는 뾰족한 방법이 별로 없다는 증거다. 약이 고질적인 정신병 증세를 어느 정도 무마시킬 수 있겠지만 성격장애 치료에는 큰 효력이 없다고 한다. 근래에는 성격장애 패턴에 대한 묘사에 매달리기보다 개인의 성격장애가 얼마나 크게 남들과 사회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해느냐는데 착안점을 두는 것이 오히려 낫다 해로움을 인지하는 것의 치료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또는 토마스 하디의 ‘테스’에서처럼 일찍이 글쟁이들은 소설에서 성격장애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성격장애가 정식으로 정신의학 진단명 자격을 획득한 해는 1952년. 성격장애는 대부분의 보험회사들이 정신질환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느로 마음의 힘으로 스스로를 치료해야한다. 마음에 내재된 내적인 에너지를 을 모두는 일을 통해서다. 마음을 챙기는 일이다. ‘mindfulness’을 사전은 ‘마음 챙김’이라 풀이한다. ‘매 순간 순간의 알아차림’이라는 설명도 이해에 도움이 된다. 자아심리학에서는 자기관찰(self observation)이라 하는데, 자신을 향한 걱정, 공포, 증오, 분노 같은 유별난 감정을 떠나서 자신의 심리적 상황을 그냥 ‘염두에 두는’ 평온한 마음가짐이다. 똑 같은 개념을 불교에서는 ‘염(念)’이라 일컫는다. ‘mindfulness’를 자기인식(self awareness)이라고도 한다. 이때 관찰과 인식의 대상은 절대로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향한 스스로 심리치료사가 되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일이다. 기독교의 핵심교리가 남을 사랑하는데 있다면 선불교(禪佛敎)는 참선을 하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자기관찰을 통한 대오각성을 목표로 삼는다. 성격장애를 치료함에 있어서도 환자의 마음상태는 물론이고, 환자를 상대하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염두에 두는 일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의 방법 치고는 참으로 미흡한 마음자세로 보이겠지만…. 새상은 우리의 마음을 엉뚱한 데로 빼어간다. 세상에 수 많은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할 때가 지금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세력과 맞서기 위해 마음의 무지개를 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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