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롬 3 : 9 - 24
제 목 : 제발 좀 벗어나봐! ------------------------------------------------------------------------------------------ 장마가 시작이 된 모양이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쉼없이 비가 내린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서 있는데 누군가 옆을 지나서 앞으로 지나간다. 아담한 체구의 머리는 조금 길게 늘어뜨려 거지 커트를한 한 아가씨가 지나간다. 머리 스타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정도로 생각하며 그저 보고 있는데 몇발자욱 걸어 가던 그아가씨가 그만 돌아서서 씩 웃고는 다시 걸어간다. 모르는 사람이어서 혹 내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웃는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사람이라곤 나 밖에 없다. 그 웃음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녀는 그 시간에 한 남자에게 헷갈리게 짧은 미소를 주고는 사라진 것일까? 비가 너무나 많이 내리는 나머지 갑자기 실성을 한 여자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요즈음 귀신이 많이 나타난다는데 비오는날 우산을 쓰며 허망한 웃음을 웃는 그녀는 혹 귀신은 아니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까 괜히 기분히 찝찝해진다. 그러나 그런것 같지는 않다. 그 웃는 웃음이 해맑았고 진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웃음이 아직까지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경건한 주일아침 설교를 전도사가 세상의 여자를 인용해서 설교를 한다는 것이 은혜 스럽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녀의 윳음은 나에게 있어서 율법인가 아니면 복음인가? 율법적인 모습에서 보면 그렇다. 그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전도사는 함부로 여자에게 눈을 주어서도 아니되고 또한 받아서도 아니되는데 전도사가 어떻게 어느날 우연히 한 여자가 그냥 지나가다가 웃는 헤픈 웃음에 마음이 빼앗겨서 넋이 나간것이 말이나 되냔 말이다. 그리고 또 더 나아가서 인간적인 노력으로 그녀를 찾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리고 나의 노력이 있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거야 라고 하는 그것은 나의 의지로 무엇을 해 보고자 하는 노력의 한 모습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율법적인 모습인 것이다. 이 전도사야 정신이나 차리시지.
그러나 복음적인 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녀를 만난것은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시기에 그것은 순간적 스침이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만남을 준비해 놓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졸업을 하자면 꼭 지나온 시간의 반이 남았는데 졸업을 하고 전임전도사로 나가기 위해서는 결혼이 필수조건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배려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지도 모른는 일이다. 한동안 그런 감정이 전혀 없는 나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우연히 아니 너무나 필연적으로 그렇게 갑자기 잊혀지지 않는 미소를 주고는 그 마음을 다시금 생기게 하신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그 여인의 미소는 복음인 것이다.
비유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자주 복음과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적인 모습속에서 살아갈때가 많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아래 있다는 말씀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그러니까 유대민족을 말하고 헬라인은 이방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된 모습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민족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유대인이기에 죄인이 아닌 의인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헬라인이기에 죄인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죄인의 모습인 것이지요. 이것은 죄의 보편성과 전적인 부패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다. 의인이 없다는 말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의로운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행해서 의인이 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이 말은 말로 짓는 죄에 대한 지적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요 입이 저지르는 범죄가 가장 클 것입니다. 말한마디에 천냥 빚도 값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될 수 있으면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듯 합니다. 말을 많이 해도 상관이 없지만 그것이 나쁘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말이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타인으로 하여금 상처를 받게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닫아 버리게 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여러분도 알겠지만 공동체에서 서로가 부딪히는 문제점들의 대부분은 말에의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고받는 언어소통의 대부분은 말에 의해서 이루어 지지요. 그래서 이 말한마디를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입술은 곧 말이다. 해야 할 말을 이유야 어디에 있든 하지 못하는 입술, 진리가 무엇인지 밝히 알면서도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지 못하는 입술, 흑은 흑이요 백은 백이다라고 밝히 말하지 못하는 입술, 드러내야 할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입술, 그러니 그 입술이 더럽다는 말이다.' '또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나불대는 입술, 불의한 세력의 강요 때문에 부르지 말아야 할 노래를 부르는 입술, 밝혀야 할 진실 대신 그 진실을 덮어 버리기 위한 거짓말을 주절 거리는 입술, 그러니 그 입술이 악하고 죄악되다는 말이다.'
15절에는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발을 준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주신 것이요. 주님이 우리에게 발을 주신 이유는 가는 곳마다 평화를 만들것을 원해서 주신 것인데 우리의 발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요? 우리가 가는 곳마다 평화는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가는곳마다 평화가 있던 곳에 그 평화가 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가는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져야 하는데 우리가 가는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져야 하는데 우리가 가는곳에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가는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되신 인간적인 썩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닌지요? 한번쯤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8절에는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지요.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 그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은 노래가 생각이 납니다. '오, 놀라워라! 그대 모습.'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눈에 뵈는게 없다는 것이지요. 간이 크다 못해 부은 사람이지요. 간댕이가 부으니까 눈에 뵈는 것도 없고 하나님도 안보이고 그러니까 두려운 마음도 없고 맞먹자 이것이죠.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 아래에 있는 자들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의 모습은 다릅니다. 그러기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해서 무슨 노력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필요없는 것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율법또한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율법으로는 다만 죄를 깨닫는것 뿐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것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율법을 무엇에 비유를 합니까? 이것 아는 친구 있으면 해달라는 것 다해 준다. 蒙學선생에 비유를 합니다. 몽학은 어린아이의 학문인 것입니다. 몽학선생은 어린아이를 이끄는 선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2+2는 몇이에요? 이런 정도의 물음을 던지지요. 어린아이에게는 '21세기 한반도 경제와 통일 정책이 무엇인지 쓰시오'라고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어린 아이같은 믿음일때 율법이 그 사람을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성장해서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는것 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율법은 신앙이 어릴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되었다면 그 율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버려야 하고 저것은 지켜야 하고 이것은 꼭행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고 하는 이런 것들은 율법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는 제발 좀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한 의'는 로마서의 핵심적인 언어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율법의 노예상태에 있던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서 참된 자유함을 얻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의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이기에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행하는 행함이나 율법의 모습속에서는 차별이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인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이것은 아무런 차별이 없는 지극히 공평한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지요.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된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그 죄된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함이든지 아니면 노력의 모습으로 된 것이 아니지요. 다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습이 죄의 모습에서 벗어나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마치 어느날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나서 씩 쪼개고 가는 그것 그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것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연신교회에서 만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여기에 와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이러한 고백을 하십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고 호흡하고 있고 공부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 하고 뛰놀고 하는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고백을 하십니까? 이런 고백을 하는자 그가 정말로 멋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앞에 고요히 엎드려 아무것도 아닌 나자신을 하나님이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심을 깨닫고 조용히 하나님앞에 감사함을 전하는자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이런 삶의 고백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희를 사랑하시옵나이까? 저희가 무엇이관대 주님의 십자가로 저희에게 영생을 주시나이까? 하나님 우리가 살면서 날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